상담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아직 만들어 보지는 않았는데요”입니다. 대부분 그다음에 “그럼 아직 특허는 이르겠죠?”가 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만들어 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출원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들고 나서 오는 분들이 이미 기한을 놓친 경우가 더 많습니다.
특허가 보호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상’입니다
특허법은 발명을 “자연법칙을 이용한 기술적 사상의 창작으로서 고도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핵심은 사상(idea)이라는 단어입니다. 심사관이 심사하는 대상은 여러분의 시제품이 아니라 명세서에 적힌 글과 도면입니다. 특허청에 물건을 제출하는 절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반대 현상이 자주 벌어집니다. 훌륭한 시제품을 들고 왔지만 그 물건이 왜 종래 기술과 다른지를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해 권리범위가 좁아지는 경우, 반대로 아직 도면 한 장 없지만 해결하려는 문제와 해결 원리가 또렷해서 탄탄한 청구항이 나오는 경우가 모두 있습니다.
심사관이 보는 것은 시제품이 아니라 명세서입니다.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만들 수 있게 썼는지가 기준입니다.
진짜 관문은 ‘실시가능요건’입니다
다만 아무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허법은 발명의 설명을 그 발명이 속하는 기술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쉽게 실시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상세하게 적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실시가능요건이라고 합니다.
즉 “A를 AI로 분석해서 최적값을 찾아주는 시스템”처럼 결과만 선언하고 그 사이의 과정이 비어 있으면, 시제품 유무와 관계없이 거절이유가 됩니다. 반대로 그 사이를 채울 수 있다면 아직 구현하지 않았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준비해 두면 좋은 것
| 항목 | 무엇을 정리하면 되나 |
|---|---|
| 해결하려는 문제 | 기존 방식으로는 무엇이 불편하거나 불가능한지. 한두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
| 해결 원리 | 왜 그 방식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특허의 진보성은 사실상 여기서 갈립니다. |
| 구성 요소 | 장치라면 어떤 부품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소프트웨어라면 어떤 데이터가 어떤 순서로 처리되는지. |
| 변형 가능한 부분 | “이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에 해당하는 대안들. 권리범위를 넓히는 재료가 됩니다. |
| 공개 이력 | 전시회, 펀딩 페이지, 논문, 발표자료, SNS 등에 언제 어디까지 알렸는지. |
도면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으로 그린 개념도나 화이트보드 사진을 주시면, 출원용 도면은 변리사가 다시 작성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잃는 것들
완성도를 높인 뒤에 출원하겠다는 판단에는 세 가지 위험이 따릅니다.
- 선출원주의 —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는 먼저 출원한 사람에게 권리를 줍니다. 먼저 생각했다는 사실은 증명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 신규성 상실 — 투자자 IR, 크라우드펀딩 페이지 공개, 학회 발표, 제품 사전 예약 페이지 모두 공개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 본인 공개에 의한 자멸 — 내가 먼저 알린 내용이 나중에 낸 내 출원의 거절 근거가 되는 상황이 실제로 발생합니다.
이미 공개했다면
발명자 본인이 공개한 경우에는 공개일로부터 12개월 이내에 출원하면서 공지예외 주장을 하면 그 공개를 신규성 판단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통하는 것이고, 해외에서는 국가별로 인정 범위와 기간이 다릅니다. 해외 진출 계획이 있다면 국내 구제만 믿기보다 출원 시점 자체를 앞당기는 편이 안전합니다.
먼저 내고 나중에 보강하는 방법
내용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지만 날짜는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국내우선권주장출원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출원일로부터 1년 이내에 내용을 보강한 후출원을 하면서 앞선 출원일의 이익을 받는 제도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흔한 오해가 있습니다. 앞선 출원일을 인정받는 범위는 최초 출원에 이미 적혀 있던 내용에 한정됩니다. 나중에 새로 추가한 부분은 후출원일 기준으로 판단되므로, 최초 출원을 지나치게 얇게 내면 결국 아무것도 확보하지 못합니다. “일단 내고 보자”가 아니라 “핵심 원리는 담고 세부만 미룬다”가 정확한 사용법입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으로,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공개 이력이나 출원 전략은 사안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므로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